“제가 좀 낯을 가려서요….”
8월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집무실에서 만난 김영란(55)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은 낯가림이 심했다.
법관 경력 30년에 대법관을 지내고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까지 거친 화려한 이력의 그였지만 이날 오전 출근길에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하러 종로의 투표소를 찾았다가 김황식 국무총리와 취재 중인 기자들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낮에 다시 가서 ‘살짝’ 투표를 하고 왔다는 김 위원장은 “언론에 나가는 걸 좀 불편해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4일 부임 이후 언론과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한 일이 없다. “업무 파악이 먼저…”라고 이유를 댔지만 실은 수줍은 성격 때문일 것이란 짐작이 간다. 그런 김 위원장이 문화일보와의 인터뷰를 ‘결단’한 것은 현안을 좀 선전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이번에 권익위에 주요한 현안이 있는데 그 취지와 중요성을 국민에게 알려야겠습니다.”
명함을 주고받기 무섭게 김 위원장은 일체의 덕담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현안이 ‘공익신고자보호법’인데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법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검토한 사안이구요. 그 뒤로 현정부의 핵심 정책과제가 됐죠. 100대 국정과제에도 들어가 있었는데, 법이 통과된 것은 지난 2월이구요, 9월30일부터 본격 시행됩니다.”
낯을 가린다는 김 위원장의 ‘공익신고자보호법’에 대한 설명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이 법은 조직 내 부패나 비리를 신고한 사람을 보호하고 보상하기 위한 겁니다. 민간 부문, 특히 기업이 불법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통해 공익을 침해하는 것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 신고자를 보호하자는 거죠. 조직에서 징계를 당하면 이를 무효화시키구요, 내부 고발자를 색출하는 행위 자체를 형사처벌하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공적 영역에서 이뤄졌던 것을 민간 영역으로까지 확대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요.”
김 위원장은 얼마전 이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제기했던 ‘공생발전’이란 화두를 꺼냈다. “동반성장이니 윤리경영 같은 말이 나오잖습니까…실은 유엔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윤리경영’을 화두로 삼아왔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골자로 하는 윤리경영 없이는 우리 사회가 유지 발전될 수 없다는 거죠. 윤리경영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도 그런 문화와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도태되고 맙니다. 기업이 자발적 동기를 갖도록 하는 게 정말 필요합니다.”
― 이 대통령은 ‘탐욕경영’이란 극한 표현을 써가면서 ‘윤리경영’을 촉구했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얘긴데,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까지는 기업이 최대 이윤을 추구하면 파이가 커져 사람들이 더불어 먹고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이젠 그 논리가 벽에 봉착한 거죠. 최대 이윤 추구를 넘어, 기업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또 공동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역할을 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겁니다.”
― 기업이 바뀌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뜻이군요.
“우리 사회는 물론 기업 자체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그러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수해 때 돈을 내놓거나 복지시설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문화와 제도를 바꿔나가기 위해 기업이 뛰어들어야 합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은 다리 역할을 할 걸로 믿습니다. 법이 시행되면 이는 대통령의 공생발전 국정 방향을 구체화하는 첫 사례가 되지 않을까요.”
국제투명성기구(TI)가 해마다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를 보면 한국은 민간 분야에서 아시아 16개국 중 꼴찌다. 이는 아무래도 기업의 부패나 부조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말했다. “공적 영역에서만 부패 예방을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어요. 민간 부문이 같이 가지 않으면 말이죠. 공익신고자보호법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거라고 봅니다.”
― 취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실정법을 넘어 정서법이란 게 있습니다. 조직 내부의 비리를 고발한 사람을 아무리 법으로 보호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에서는 왕따가 될 텐데요.
“금전적으로 보호해주고 정신적인 피해를 볼 경우 의료비용까지도 다 보상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물론 내부 정서를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내부 고발을 결심하는 경우라면 이미 그만한 외풍을 견딜 만한 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대통령이 천명한 공생발전이 곧 권익위의 화두이기도 하군요. 그런데 공생발전이란 말이 좀 어렵습니다. 위원장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쉽게 풀어주시죠.
“공생발전은 시대정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윤리경영이라는 건 이미 국제적 흐름이고 대세입니다. 유엔이 주도하는 사회적 책임지표랄까, ‘ISO26000’ 같은 것도 그렇구요…. 대통령도 지난해 말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반부패 협력을 끌어냈잖아요. 거기에 민간과 공공 부문의 반부패 관련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게 다 공생발전과 연결되는 겁니다. 2009년의 친서민정책과 2010년의 공정사회 등 지금까지 해온 것을 이번에 대통령이 새로운 ‘내레이션’으로 풀어낸 거죠. 정책적 의지는 죽 있어 온 겁니다.”
―공생발전은 권익위 차원에서는 반부패로 연결되는 거네요.
“네. 저는 국제사회가 그동안 추진해온 반부패와 관련된 여러 움직임과 노력, 일련의 흐름을 ‘반부패 라운드’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스스로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가야죠. 우리 기업들이 반부패라운드에 맞춰 시스템과 경영 방침을 바꿔야 합니다.”
―공생, 영어로는 ‘Ecosystemic’인데, 내년 총선이나 대선용으로는 좀 어려운 측면이….
“그게 좀 아쉬워요. 국민에게 다가갈 때엔 좀 쉬워야 하는데, 그죠.”
정치 얘기가 나오자 김 위원장이 말을 돌렸다. “지금 정부 내에 공정사회론이나 공생발전론 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면 이건 잘못된 겁니다. 청와대에서 정부와 기업의 체질을 바꾸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G20 때 ‘반부패 행동계획’을 채택했잖아요. 그게 전부 연결돼 있습니다. 정책 결정자들이 이를 부정하면 대통령의 경축사를 부정하는 거죠.”
김 위원장은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뒤 지난해 퇴임할 때까지 30년 동안 법원을 떠난 일이 없다. 하지만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임명된 지 두 달 만에 권익위원장직을 맡게 됐다. 상당히 빠른 변신으로 보인다.
“저도 저를 시키신 이유를 모르겠어요. 대통령이 저를 모르잖아요. 행정을 해 본 일도 없고, 판결밖에 (한 일이) 없는데…. (위원장직을) 끝낼 때 알게 되겠죠. 다만 저를 시킨 건 반부패와 관련한 정책적 기조가 있는데, 그걸 잘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님은 법조에 계실 때부터 사회적 소수, 마이너리티들을 배려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곳에 온 것도 그것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대통령이 왜 저를 이 자리에 임명했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해석하기로는…대통령이 친서민, 중도실용, 공정사회 이런 걸 일관되게 주장해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공정사회 이념에 맞는다…이렇게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하하. 그래서 대통령의 정책 기조에 맞게 우리 위원회를 잘 해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권익위라는 이름이 국민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반부패위원회 같은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름도 있는데 네이밍이 좀….
“고충민원처리, 반부패, 행정심판 등 3개 기관의 기능을 합치면서 좀 더 큰 패러다임에서 국민권익을 보호한다고 해서 나온 거 아닐까요. 혹자는 위원회의 성격이 모호해졌다거나 반부패 의지가 상실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그런 인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와서 느낀 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실 반부패 감시 기능이라면 국무총리실에도 있고 감사원에도 있고 검찰 등 사정기관에도 있다. 또 행정 각부와 공공기관들은 자체적으로 비리와 부패를 적발하거나 예방하기 위한 감사기구를 두고 있다. 국회에도 국정감사나 국정조사 같은 감시 시스템이 있다. 그렇다면 권익위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중이 제 머리 못 깎잖아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거든요.” 김 위원장에 따르면 권익위원회는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시작된 ‘옴부즈맨기관’과 닮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한국적 기관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공적 영역에서 독자적인 옴부즈맨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기관에 걸쳐 있는 민원을 해결해주는 이런 기관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여러 기관의 이해가 얽혀 있어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안이 많습니다. 이를 해결해주는 겁니다. A 기관에는 이걸 요구하고, B 또는 C 기관에는 저걸 요구하고, 국민에게도 조금씩 양보를 받아내 타협점을 찾아내도록 하는 거예요. 이해 관련자들이 조금씩 물러서는 명분을 주는 거죠. 우리나라만의 독특하고도 세계적인 모델입니다.”
권익위는 월드뱅크의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거버넌스를 통한 반부패척결전략’을 소개한 일이 있다. 김 위원장은 “저희가 반부패 정책이나 예방 정책을 만들고 교육하고 통계자료를 분석 수립하고 민원 처리 방식을 컨설팅해주는 이런 것들을 공적 영역에서의 세계적인 ‘반부패 운동 모델’로 개발하겠다는 꿈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행정기관 통합의 독특한 모델인 권익위를 전 세계에 홍보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기업인, 정치인, 관료들의 수준을 각각 평가해주시죠.
“글로벌 영역을 개척한 건 역시 기업과 기업인들이죠. 그들의 기여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 경제관료들의 힘이 보태졌구요. 앞으로 지속경영과 글로벌 스탠더드만 갖춰진다면 더 좋겠지만요. 정치인은… 국회에 가 보니 실력 있는 국회의원도 많더라구요. 정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전문성을 확보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또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공무원들이나 행정관료들이 열심히 일하고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부패지수가 왜 개선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김 위원장은 부패의 개념 자체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뇌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정의됐지만, 지금은 ‘인적 네트워크에서의 소속감 박탈’로 그 범위를 넓혀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연고로 인한 청탁과 이권이라는 고리를 끊으면 한국의 반부패지수는 한층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김 위원장은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부임해서 이제 8개월이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점수를 매겨보라고 하자 “이제 시작”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와서 공부하고 배우느라 3개월을 보냈습니다. 직원들을 융합시키는 일, 어떻게 하면 위원회에 애정을 갖고 끌어가도록 할까 등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위원회의 방향과 이념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찾아내는 데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습니다. 이제 시작한 것 같은데, 아직 점수를 매길 때가 아닙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그는 8년이란 기수의 차를 넘어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40대 대법관직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그를 ‘진보 코드’로 분류하기도 했다. 반부패를 주요 사명으로 하는 권익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그런 성향과 관련이 있을까. 김 위원장은 자신의 이념적 토폴리지를 보수와 진보 둘 중 하나를 택하기를 꺼렸다. 보혁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못하는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만 여성 문제만큼은 저는 진보입니다. 진보가 필요합니다. 진보적 이념 없이 (여성의 지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요. 진보가 필요 없다면 요즘 여성들은 조선시대 여자들처럼 사회활동을 못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사안에 따라 진보가 될 수도, 보수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 위원장은 민주주의란 다수를 따르는 제도이며 누군가가 소수자를 사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사법부가 바로 이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국회의원은 자신을 대표로 뽑아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 되지만 사법부는 자신의 대표자를 낼 수 없는 집단을 위해 목소리를 내줘야 합니다. 소수를 대변하는 것도 사법부의 일인 거죠. 이게 제가 사법부에서 진보로 평가된 이유입니다.”
김 위원장은 다수자는 소수자 입장에서 간과한 게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실은 전체 다수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말과 함께.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얼 워런의 말을 인용했다. ‘법률의 해석은 다수자가 현재 상태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저는 단지 우리 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라 목소리를 낸 것 뿐인데요. 그냥 법치주의에 충실하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인데요. 하하하.”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셨는데, 엄마의 성(姓)을 따라가는 것을 완전히 허용하는 문제는 어떻게 봅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그게 세계적 추세니까요. 그렇게 바뀌어도 대부분은 해오던 대로 아버지 성을 따라가지 않을까요.”
―양승태 신임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지금의 이용훈 체제와는 이념적 지형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법원장 한 분이 바뀐다고 해서 사법부가 크게 바뀌고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법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겁니다. 결국은 한계선상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문제 아니겠어요.”
인터뷰 = 허민 사회부장 minsk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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